‘안방의 세월호라고도 말하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 사망자가 천 명이 넘고, 6천 명에 달하는 피해자가 발생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화학 참사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모티프가 된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사건. 79명의 사망자를 냈고, 11년에 걸친 오랜 공방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인재[人災]. 앞서 열거한 두 사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대기업에 의해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질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애초에 영화 <김군>을 이야기하는데 이런 것을 묻는 이유가 무엇일까?

 

 <김군>5·18 민주화 운동 당시 사진 찍힌 한 남자에 관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지만원은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며 사진 속의 그를 북한군 1광수라 지목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실재하는 하나의 진실(5·18 민주화 운동에 북한 개입은 없음)은 잠시 뒤로 물린다. 그 대신 지만원이 직접 북한군 개입에 관해 설명하는 장면을 공들여 비춘다. 자신이 지목한 광수들의 인상이 북한 고위인사들과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증거로 자신 있게 제시한다. 영화는 터무니없는 주장과 비과학적인 근거를 진지하게 내뱉는 그 우스운 모습을 초반부에 내세운다. 그럼으로써 거짓에 반박하기 위한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증거를 보여주지 않고도 진실을 가려낸다.

 

 이제 진실과는 별개로 영화는 1광수로 지목된 사진 속 남자를 추적해 나간다. 당시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시민을 인터뷰하며 그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주옥 씨는 그 인물을 아버지 막걸리 가게에 자주 오던 김 군이라고 기억한다. 김 군의 마지막 순간과 함께했던 시민군도 찾아낸다. 북한군 광수가 광주 시민 김 군으로 밝혀진 결말은 극적이지도, 놀랍지도 않다. 여기서 <김군>이 사진 속 인물을 찾아 나선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지만원의 거짓 주장에 착실히 반박하거나, 전에 없던 새로운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성적인 사람은 그의 주장이 망언임을 진작 알 수 있다. ‘1광수가 김 군이라는 사실을 몰라도 진실에는 변함이 없고, 5·18 민주화 운동에서 북한의 개입이 없었다는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친다.

 

지만원씨의 '과학적'인 근거 자료

 

피해자가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사회

 

 자, 이제 위에서 물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두 사건의 첫 번째 공통점은 피해자에게 발생한 손해를 피해자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살균제 피해 신고자의 약 80%는 엄격한 기준 때문에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신 질환이나 각종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의학적 인과관계를 본인이 입증해야 하는 억울한 상황에 놓여있다.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건은 또 어떤가. 고 황유미 씨가 문제를 알리고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 황상기 씨는 공장의 유해성을 밝히기 위해 직접 증인을 모으고, 시민단체를 조직했다. 가해자의 유해물질로 피해자가 손해를 입었다면, 가해자 측에서 무해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사회 형평의 관념에서 옳을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는 강자요, 피해자는 약자인 우리 사회에서 균형과 평등은 이상일 뿐이다.

 

 <김군>은 극우 논객이 뱉는 얼토당토않은 말과 그것을 믿고 추종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광주 시민들이 그날의 상흔으로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극우 세력은 폭력적인 언행과 역사의 왜곡으로 광주를 모욕한다. 영화에서 인터뷰했던 한 시민군은 말한다.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으니 왜곡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 우리는 5·18 민주화 운동의 새로운 가해자와 피해자를 확인할 수 있다. 가해자는 군사정권에서 극우 세력으로 달라졌지만 아픔을 겪는 피해자는 바뀌지 않았다. 가해자의 북한군 몰이에 피해자인 광수들은 본인이 광주 시민임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치욕스러운 처지에 몰렸다. 광주의 순수와 정의가 욕보인 이때 <김군>1광수추적에 나섰다. 피해자가 진실을 밝히는 수모를, 그 굴욕과 창피스러움을 덜어주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반도체 백혈병 사건의 두 번째 공통점. 오지랖 넓고 양심적인 사람의 연대. <김군>김 군을 찾은 이유와 같다.

 

 피해자 주변에 환경운동연합, 시민단체 반올림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사람이 모였다. 현재,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인정비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보상에 관한 이행을 협약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길가에 쓰레기를 줍고 동네를 청소하는 사람, 도로에 쏟아진 술병을 함께 치워주는 사람, 고성 산불에 화약고를 지킨 사람, 태안 앞바다의 기름을 닦는 사람, 가습기 살균제와 손상 환자의 인과관계를 의심한 홍수종 교수, 반올림의 임자운 상임 변호사, 그리고 광수 추적한 강상우 감독. 당사자는 아니지만, 무엇이 옳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문제의식을 느끼고 사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 연대는 변화를 만들고, 그 변화는 항상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사람의 일상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여태 망하지 않고 버텨온 이유는 한 사람, 그 한 사람 때문이다.

 


2019/06/18 - [영화평&리뷰] - 불행에 대처하는 나만의 방법, <완행열차> 영화평(스포주의)



+ Recent posts